
시시포스는 신들을 기만한 죄로 언덕 위로 돌을 굴리는 벌을 받는다. 꼭대기까지 올리고나면 돌은 굴러 떨어져 다시 올려야한다. 이 과정은 영원히 반복된다. 시시포스는 참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행동이 무의미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이 생각은 우리 삶까지 확장 되었다. 우리 삶은 시시포스의 형벌과 같다. 매일, 매주, 매년이 반복되며 돌을 굴린다. 시시포스의 행동이 무의미하다면, 우리의 삶도 무의미하다. 이 사고를 부정할 수는 없을까?
생각해보면 세상은 부조리함으로 가득 차있다. 특히 인간의 삶이 그렇다. 시작부터 태어남 당했고, 끝으로는 죽임을 당한다.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삶은 고통으로 가득하다. 좋은 동반자를 만나거나 많은 재산을 획득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은 언젠가 내 것이 아니게 된다. 최악의 부조리는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칠흑 속에서 ‘오징어 게임’의 ‘유리 다리 게임’을 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부조리에 대해 인간은 무력하다. 부조리를 부여한 신(자연 법칙) 앞에서 인간은 너무나도 작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삶의 부조리에 대항하는 방법은 세가지다. ‘자살’, ‘희망’, ‘반항’. 자살로 고통을 조기에 종료시킬 수 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자살은 회피에 불과하며, 부조리를 인지한 뒤의 희망은 자기기만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의 유일한 선택은 반항이다. 인간의 삶에 주어진 무의미함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이다. 반항인은 ‘절망하지만 회피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자. 희망이 없음을 인지하고, 자살로 회피하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따라서 반항은 그저 살아가는 것이다. 부조리는 그것을 자발적으로 수용함으로 인해 해소된다.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다.
시시포스는 반항인이다. 형벌을 회피하지도, 헛된 희망을 품지도 않는다. 자발적으로 돌을 굴린다. 따라서 형벌은 그 가치를 잃는다. 시시포스는 돌을 굴리며 의미를 찾아낸다. 돌을 굴리며 변하는 풍경을 구경한다. 삭막하던 언덕에 꽃도 피고, 처음보는 사람도 지나간다. 그에게는 그것이 삶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부조리한 세상에서 회피하지도, 헛된 희망도 품지 말아야한다. 자발적으로 부조리한 삶을 긍정할 때, 모든 부조리는 가치를 잃는다. 하루하루 발생하는 작은 사건들이 삶의 이유가 되고, 의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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